노 한(盧 閑)
- 시 대
- 조선 전기
- 활동분야
- 문신
- 본 관
- 교하(交河)
- 자
- 유린(有隣)
- 호
- 효사당(孝思堂)
- 대표관직
- 우의정
공숙(恭肅)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本貫)은 교하(交河)이며 자(字)는 유린(有隣), 호(號)는 효사당(孝思堂)이다. 첨의정승(僉議政丞) 책( )의 증손이고, 아버지는 대리경(大理卿) 균(鈞)이며 좌의정 민제(閔霽)의 사위로 태종과는 동서간이다.
16세에 음보로 등용되어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거쳐 태종 3년(1403)에 좌부승지가 되었고, 이듬해 이조전서(吏曹典書)·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1405년 동지총제(同知摠制), 이듬해 풍해도도관찰사(豊海道都觀察使) 등을 거쳐 1408년에 한성부윤에 이르렀다. 이듬해 처남 민무구(閔無咎)·무질(無疾) 형제가 신극례(辛克禮)와 함께 종친을 이간하고 불충(不忠)의 언동이 있었다고 하여 이화(李和)등의 탄핵을 입어 유배, 사사(賜死) 되자, 이에 연좌되어 1409년에 파직 당하였다. 그 후 고향 양주별장에서 14년간을 은거하였는데 세종 4년(1422)에 상왕 태종이 "노한이 민씨에게 장가를 들었다고 고신(告身)까지 거두게 된 것은 그의 죄가 아니니 급히 불러들이라."는 전교에 의하여 다시 한성부윤에 복관(復官)되었다. 그 뒤 형조판서·참찬의정부사·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거쳐, 1432년에 찬성사(贊成事), 1434년에 찬성사 겸 대사허, 이듬해 우의정 등을 지내고, 1437년에 사직하였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라. 묘는 시흥군 북면 노량진리(현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었으나 1940년에 파주군 주내면 백석리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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