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석동(黑石洞) 이라는 동명은 흑석 제1동사무소 남쪽 일대에서 나오는 돌의 빛이 검은색을 띠므로 '검은돌(黑石)' 마을이라 한데서 유래한다.
현재의 흑석동 강변(원불교 서울회관 부근)에 있던 나루였다. 조선 초기에 민간인들이 많이 이용하였으며, 태종 4년(1385)에는 세곡의 운송을 위해 용산에서 충주 간 7개소의 수참(水站)을 설치할 때 흑석나루에 수참이 설치되어 참선(站船)의 정박소로 이용되었다.
조선 후기에 참이 폐지되고 동작진이 개설되면서 기능을 잃어갔으며, 광복 이후 조정경기훈련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흑석2동 시민아파트가 있었던 아래쪽 한강변에 있었던 바위이다. 옛날 이곳에는 많은 낚시꾼들이 모여들어 고기잡이를 하였다 한다. 어느날 한 낚시꾼이 커다란 잉어 한 마리를 낚자 갑자기 눈보라와 모래가 휘날려 눈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히 여긴 나머지 뒤를 돌아다보니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나 어슬렁거리며 앞발을 내미는 것이었다. 낚시꾼이 질겁을 하고 도망을 치자 호랑이도 그 뒤를 쫓아왔다. 낚시꾼이 더 이상 도망을 가지 못하고 마침 그곳에 구멍이 뚫린 큰 바위 속으로 들어갔더니 호랑이가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두리번거리고만 있었다. 그러자 그는 그 바위 속에 갇혀서 나오지도 못하고 결국 죽었다고 한다. 이 호랑이가 앞발짓을 한 것은 잉어를 달라는 뜻이었는데 낚시꾼은 자기를 잡아 먹으려고 하는 줄 알고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서달산 꼭대기에 있었던 건축물로, 1920년 일본인 부호 목하영(木下榮)이란 사람이 이곳에 별장을 짓고 놀이터를 만든 다음, 맑은 한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경치 좋은 곳이라 하여 명수대란 이름을 붙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광복 후 이 건물은 철거되었다.
동양중학교 왼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 이곳 주민들이 이 산을 오르려면 숨이 가빠 헐떡거렸다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 이 산마루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연날리기를 많이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