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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사찰인 사자암(獅子庵)은 1396년(태조5년) 무학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무학대사가 한양 천도 계획을 실행하고자 하는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서울의 풍수지리를 살펴보니, 만리현(현재 만리동)이 밖으로 달아나려는 백호의 형상이었다. 이에 무학대사는 백호의 움직임을 막아낼만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만리현의 맞은 편인 관악산에 호압사(虎壓寺)를 지었고 사자형상인 국사봉 이곳에 사자암을 조성한 것이다. 사자암은 조선 후기에는 완전히 퇴락하여 그 명맥이 끓어졌던 것으로 보이며, 20세기에 들어와 중수한 기록을 볼 수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보전, 단하각, 수세전, 종각, 요사채 3동 등이 있다.
호국지장사는 원래 통일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갈궁사(葛弓寺)가 시초이다. 이후 창빈 안씨(昌嬪 安氏)의 원찰로 지정되어 화장사(華藏寺)로 이름을 고쳤고, 다시 1983년에는 국립묘지에 안치된 호국영령들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로 바꾸게 된 것이다. 호국지장사라는 절 이름에 어울리게 현재 절에는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로 2500여 좌(座)의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정조(재위 1776∼1800)가 그의 부친 사도세자가 묻힌 수원 화산의 현륭원을 찾을 때 잠시 쉬던 정자이다.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현륭원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 때마다 한강에 배다리를 임시로 만들어 건넜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잠시 쉴 자리가 필요하여 이 정자를 지었다고 전한다. 용양 봉저정은 가운데에 온돌방을 두고 양쪽으로 퇴칸을 둔 간소하면서도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조선 세조 2년(1456) 조선의 6대 임금인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목숨을 바친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6명의 신하 즉 사육신(死六臣)을 모신 곳이다.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숙종 7년(1681)에 이곳에 서원을 세우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는 비)를 세워 두었다.
조선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1394∼1462)의 묘와 사당이다. 사당은 숙종 1년(1675) 임금의 명에 의해 세운 것으로, 원래 숭례문 밖에 있던 것을 191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은 것이다.
조선 중종의 후궁이며 선조의 할머니인 창빈 안씨(1499∼1547)의 신도비(神道碑:조선시대에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와 묘소이다.묘는 처음에 양주 장흥 땅에 있었으나 다음해에 현재의 자리인 동작동 국립묘지 안으로 옮겨졌다. 묘 왼쪽으로는 숙종 9년(1683)에 세운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은 신정이 지었고 글씨는 이정영이 썼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앞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임당 정유길(1515∼1588)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정유길은 중종 33년(1538)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언에 임명된 후 여러 관직을 두로 거쳐 선조 18년(1585)에는 좌의정에 이르렀다. 충효와 근신을 근본으로 삼고 넓은 도량을 가지고 있어 포섭력이 강하였으며 큰 일에는 대의를 가지고 과감하게 처리하였다. 또한 시와 글짓기에도 뛰어났고 서예에도 능하여 임당체(林塘體)라는 평을 받았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받침돌 어깨부분에 새겨진 연꽃모양과 머리돌의 쌍룡무늬 조각이 매우 정교하다. 인조 24년(1646)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외손자인 김상헌이 짓고, 글씨는 오원이 썼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서곡(西谷) 이정영(1616∼1686)의 묘이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에 있으며, 묘 앞에는 묘비·상석이 있고 좌우로는 망주석(望柱石: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돌기둥)·문인석이 있다.
서울 동작구 사당동 지장사에 있는 철로 만든 약사불로 전체 높이 98㎝, 폭 70㎝의 불상이다.
얼굴은 둥글면서도 수척한 모습이고, 상체는 비교적 당당하지만 양 어깨를 강조하여 움추린 모습이다. 왼쪽 어깨만 감싸고 있는 옷은 주름표현이 선명하고, 왼손에는 약그릇을 잡은 것처럼 표현하여 약사불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고려 초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철불좌상이며 당시에는 보기 드문 약사불로 신앙사 연구 등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괘불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던 대형 걸개그림을 말한다.
지장사에 보관된 이 괘불은 석가를 비롯한 삼존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린 그림으로, 가로 287.3㎝, 세로 456㎝ 의 크기이다.
상단에 그려진 삼존은 전체적으로 부자연스럽게 표현되어 형식화된 느낌이고, 하단에 그려진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비교적 자유롭고 활달하게 묘사되어 위와 대조를 이룬다. 적색과 녹색, 청색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이 시기에 제작된 다른 불화들보다 색채가 밝아 눈길을 끈다.
이 그림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시기의 전형적인 괘불 유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