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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와 민요

박태보(朴泰輔) 설화

박태보가 노강서원(鷺江書院)에 모셔진 일과 관련 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박태보는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또 얼굴이 남중일 색(男中一色)이었다.

어느날 참판 이종염(李宗燁) 집에 심부름하는 여인 하나가 그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박태보의 유모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유모가 그 사정을 딱하게 여겼으나 박태보의 심지가 곧으므로 차마 입을 열어 볼 수가 없어 그의 모친에게 이야기를 해보았다. 그의 모친 역시 그 여인의 짝사랑을 동정하여 남편 서계공(西溪公)에게 아들을 좀 달래보라고 청하였다. 그리하여 그 부친이 박태보를 불러 여인에게 한을 남기면 앞으로의 길에 장애가 될 것이라 훈계하였으므로 박태보도 부친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 여인은 박태보의 양친을 뵙고 스스로 머리를 쪽지어 출가한 부녀처럼 하고 다녔다.

세월은 흘러 박태보는 그 뛰어난 재주로 벼슬길에 올랐고 여인은 그의 기억에서 차츰 멀어졌다. 숙종 15년(1689) 중전에 대한 장희빈의 끈질긴 모함이 성공하여 왕이 중전을 폐비하려 하자, 직언(直言)을 잘 하던 박태보는 이 소식을 듣고 붓을 들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도로 귀양을 가게된다. 그러나 귀양지로 가는 길에 국문시 입은 장독(杖毒)과 화상 (火傷)이 심해 친구집에 있는 노량진에 머물렀다. 이때 어느 여인이 와서 박태보를 한번 뵈옵기를 청하였다. 방문객은 바로 전일에 박태보를 사모하여 혼례식도 올리지 않고 출가한 부녀자처럼 쪽을 지고다니던 그 여인이었다. 박태보는 멀어져가는 정신을 간신히 수습하여 겨우 손을 들어 여인의 손을 한번 꽉 잡은 다음 그만 목숨이 다했다. 여인은 그 앞에서 울고 또 울다가 일어나 나갔다. 그 후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노강서원이 완성되던 날, 그 여인은 소복을 입고 서원 뒤 서까래에 목을 매어달아 싸늘하게 죽었다고 한다.

노들강변

<노들강변> 민요는 옛날 노들나루터에서 불리운 민요로 우리구와 함께 길이 남을 동작구의 민요이다. 이 노래는 신민요로 등장하였으나 해를 거듭할 수록 우리 민요화한 노래로 작사자는 만담가로 유명하였던 신모씨이고, 문호월(文浩月)의 작곡이다. 현재 이곡은 무용곡으로 널리 쓰이고 있으며, 경쾌하면서도 애조가 담뿍 들어 있어 이 세상 한을 물에다 띄워보내려는 심정을 읊고 있다. 우리 겨레의 얼과 그 옛날 노들강(오늘의 한강)의 정경이 담긴 이 노래는 6·25 동란 후까지도 남녀노소간에 즐겨부르던 민요이다. 이 노래만으로도 노들강변의 가지를 늘어 뜨린 수양버들과 한강의 푸른 물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 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서 메어나 볼까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으리로다 흐르는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가노라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 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서 메어나 볼까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으리로다 흐르는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가노라
노들강변 푸른물 네가 무삼망령으로 재자가인(才子佳人) 아까운 몸 몇몇이나 데려갔나 에헤 네가 진정 마음을 돌려서 이세상 싸인한이나 두둥싣고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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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업데이트
2022년 07월 0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