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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노량진 동사무소가 있던 사육신묘 입구 동산에 건립된 사액서원. 조선 영조 때 (1725) 건립된 것으로, 경종 원년에 신임사화(1721)로 희생된 노론 4대신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조태체(趙泰采), 이이명(李命)을 모신 곳이다.
사육신묘 서쪽 기슭 가칠목 마을에 있던 사액사원으로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 때 죽은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를 모셨다.
노량진동 사육신묘지 산마루에 위치했던 사육신을 모셨던 서원. 원래 이곳은 사육신 사건이 일어난 지 243년 뒤인 숙종 8년(1682)년 지호(芝湖) 이선(李選)의 상소에 따라 동작진에 육대사(六臺祠)라는 사당을 세우고 육신을 추모하다가 숙종 17년(1691)에 현재 사육신묘가 있는 산위에 새로 서원을 세우고 숙종이 친히 ‘민절서원’이란 사액을 하사하였다.
조선초기의 문신인 노한(1376 ~ 1443)이 모친 사후 3년간 시묘를 했던 자리에 지은 정자로서, 때때로 올라 어머니를 그리워했는데, 이를 기리어 당시 이조판서 강석덕(姜碩德)이 효사정이라 이름 붙였다. 예로부터 한강을 끼고 있는 정자 중 경관이 가장 뛰어났다고 하는데, 현재의 효사정 역시 서울특별시 우수경관 조망명소 중 하나로 선정됐을 만큼 아름다운 풍관을 자랑한다.
월파정은 옛날 판서였던 장선징(張善徵)의 정자로 지금의 수산시장 남쪽에 그 터만이 남아있다. 이 별장은 1776년 정조가 노들강 기슭에다 세운 것이라고 전해지며 그 훨씬 전 세종때의 영의정 김종서가 터를 잡고 살았다고도 전한다.
노량진은 한강 남안, 지금의 한강철교와 한강대교 사이 강변에 있던 나루터로 옛부터 수양버들이 울창하여 노들나루라 하였고 백로가 노닐어 노량진이라고도 했다. 이 나루는 한양에서 시흥, 수원방면을 거쳐 충청, 전라를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에 있어 조선시대에는 군대가 주둔하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이곳은 나루로서뿐만 아니라 석벽 위에 아담한 봉우리 밑으로 강물이 교교히 흐르는 절경이 펼쳐져 전국의 명인들이 누정을 짓고 감회어린 시구절을 읊었으며, ‘노들강변’이란 민요도 널리 전승되었다.
동재기는 흑석동에서 현재 국립현충원으로 넘어오는 강변 일대에 검붉은 구리빛(銅)색을 띤 돌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서 붙어진 이름으로, 이 나루는 조선시대 서울에서 과천, 수원, 평택을 거쳐 호남으 로 내려가든가, 또 서울로 들어오던 사람들이 배를 타고 건넜던 교통의 요지였다. 동작진은 문헌상과 천현 북쪽 18리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현재 동작역이 있는 이수천 입구로 추정된다.
현재의 흑석동 강변(원불교 서울회관 부근)에 있었던 나루이다. 조선 초기에 민간인들이 많이 이용하였으며, 태종 4년(1385) 에는 세곡의 운송을 위해 용산-충주간에 7개소의 수참(水站)을 설치할 때 흑석나루에 수참이 설치되어 참선(站船)의 정박소로 이용되었다. 조선 후기에 참이 폐지되고 동작진(銅 雀津)이 개설되면서 기능을 잃어갔으며, 광복이후 조정경기훈련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양녕대군 이제 묘역이 위치한 남쪽 산을 말하며, 해발 184m의 작은 산으로 관악구 봉천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국사봉(國思峰)은 양녕대군이 이 산에 올라 멀리 경복궁을 바라보며 나라와 동생 세종의 일을 걱정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상에서는 서울의 동서남북이 한눈에 들어온다.
용양봉저정은 조선시대 정조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경기도 수원현륭원 참배길에 한강을 건넌 후, 잠시 휴식하기 위하여 세운 행궁으로 "용이 뛰놀고 봉황이 높이 난다"는 뜻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