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목(忠穆)
단종복위를 추진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기계. 자는 신지(信之)·선장(善長), 호는 벽량(碧梁).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첨지중추원사·경원절제사를 지내고 1452년(단종 즉위) 의주목사, 1453년 평안좌도절제사 등을 역임했으며, 1455년(세조 1) 동지중추원사에 임명되었다.
세조 즉위 후 왕권이 강화되고 신권이 약화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세조의 불의의 찬탈에 대한 저항이라는 대의가 내세워지고 있었다. 이에 그는 전직·현직 집현전 출신인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모의했다.
세조가 상왕(上王: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에 초청하여 벌인 연회에서 성승(成勝)과 함께 별운검(別雲劒)을 맡게 되자 그 자리에서 세조와 측근관료들을 제거하고 상왕을 복위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세조가 연회 당일 별운검을 폐지하도록 명했으며, 왕세자도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그대로 거사할 것을 주장했으나 성삼문 등의 만류로 모의를 뒤로 미루게 되었다. 이때 모의에 참여했던 김질(金礩)이 이 사실을 세조에게 밀고함으로써 단종복위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그를 포함한 주모자 6명은 체포되어 형살(刑殺)되거나 자살했으며, 이에 연루된 70여 명이 화를 당했다. 세조가 국문하면서 그에게 "너는 무엇을 하려 했느냐"라고 묻자, "한 칼로 족하(足下:세조를 가리킴)를 죽이고 본 임금을 복위시키려 했다"고 대답하여 극심한 고문을 받고 죽었다.
남효온(南孝溫)이 《추강집》의〈육신전 穴臣傳〉을 지으면서 단종복위의 거사 주모역은 성삼문 • 박팽년이고, 행동책은 유응부이기 때문에 이 세 사람이 한 일을 삼주역 (三 主役)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 사육신이라는 명칭은 남효온의〈육신전〉이 세상에 공 포된 뒤 그대로 확정되어, 숙종 17년(1691)에 사육신의 절의를 국가에서 공인하여. 성 삼문 • 박팽년 • 하위 지 (河經地) • 이 개 (季增.) • 유성원 (柳誠源) • 유응부 등 6인의 관작 을 추복(追復)시켰고. 정조 15년(1791) 단종을 위하여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은 《어정배식록 御定配食錄》을 편정 (編定)할 때에 사육신으로 재차 확정되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愁節書院), 홍주의 노운서원(魯普書院). 연산의 충곡서원(忠谷書院). 영월의 창절사(影節神). 대구의 낙빈서원(格濟書院), 의성의 충렬사(忠烈雨), 강령의 충렬사 등에 제향되었다. 영조 34년(1758)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 (說號)는 충목(忠穆)이다.